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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마루★ - 김선욱 『한나 아렌트와 차 한잔』

대의민주주의를 넘어 숙의민주주의로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인 깨어있는 시민’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 관한 이야기

# 숙의민주주의의 서막

“주권자인 나는 매우 바쁘니 당신이 나 대신 통치하시오.” 이 한 마디가 대의민주주의의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을 것이다. 시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생업에 집중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나의 의사를 대신할 대표를 뽑고 나의 권한을 위임한 것이다. 그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시작이었을 터이다.

그러나 맹점이 생겼다. 주권자의 의사결정이 대의자에게 위임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자의 의사결정이 주권자를 지배할 위험이 생긴 것이다. 기존 언론과 기득권 카르텔층, 그리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주권자들보다 더욱 치밀해졌다. 그들에게 그러한 작업은 자신들의 생업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는 주권자가 대의자를 끊임없이 감독하고 견제해야 한다. 권한을 잠시 위임한 것이지 완전히 이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의자, 또는 대의자에 버금가게 권력과 권한을 가진 자들에게 자신의 의사결정까지 대의 한다면 이러한 견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자인 시민은 권한은 위임하되 의사결정의 과정만큼은 스스로 해내야 한다. 어쩌면 독립된 의사결정은 주권자가 주권자일 수 있는 마지막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

# 대의민주주의의 위기. 그 중심에서의 한나 아렌트.

그렇다면 지금은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상향식 의사결정이 아니라 하향식 의사결정으로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대의민주주의는 시민의 요구와 의사를 대의자들이 집약하여 정책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그러나 지금은 유력 정치인, 영향력 있는 미디어, 소수의 전문가가 먼저 의제를 제시하고 자기 생각을 공유하면 마치 복사 붙여 넣기가 이뤄지는 것처럼 시민에게 퍼져 나가고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높은 시민의식 덕분에 아직은 우려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두려워할 것은 하향식 의사결정의 구조화를 넘어, 그 의사결정이 스스로 이뤄낸 것이라는 착각이다. 한나 아렌트의 여러 정치철학 저서는 하나의 의제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사유’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유럽의 전체주의,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본성을 직면해왔다. 높은 문명을 이뤄낸 인류가 왜 동물보다도 더 잔인한 야만성을 발현하는지, 특히나 자유로운 개인들이 왜 하나의 전체주의의 부품이 되어 가는지 치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