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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 - 김종인 <영원한 권력은 없다>

진보 정치인은 어디에 있는가

김종인 전 위원장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를 읽고, 정치인이란 무엇인지, 나아가 좋은 진보 정치인이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을 구분지어 부르곤 한다. 마치 경제와 경제학을 economy-economics로, 사회와 사회학을 society-sociology로 달리 부르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와 정치학은 모두 politics로 호명된다. 정치에서 이론과 실천은 그만큼 구분되기 힘들며, ‘정치’와 ‘정치인’이 사실상 매한가지이다. 정치 행위자의 내밀한 상호작용을 특정한 인과로 도식화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여기에 다른 분야와 차별화되는 정치의 특유함이 있다.

그 정치판에 김종인은 오랫동안 몸담아왔다.  민주화가 되기 전과 후에, 그리고 이념 구획의 왼편과 오른편 모두에서 그는 정치를 해왔다. 정파를 초월하여 단독자로 행세하는 김종인에 대해 왈가왈부 말은 많았으나 그는 의문에 대해 결과로 대답해왔고, 아직까지도 선거 때마다 구애받는 한국 정치의 변수인 것만은 틀림없다.

김종인이 그의 할아버지 김병로의 어깨너머로 정치를 배우던 1960년부터, 이제 그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아진 2020년까지, 이 책이 약 400 페이지에 걸쳐 풀어내는 증언은 어쩌면 근현대의 정부사(史) 그 자체다. 수많은 사건들이 이리저리 얽혀있어, 자칫 회고록이라는 장르의 느슨함이 이 책을 높으신 분의 굵직한 썰 정도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는, 그 명멸하던 사건들을 엮어낸 김종인의 초점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첫번째, 정치와 정치인의 기본 속성, 그에 선행하는 인간의 기본 속성은 무엇인가? 두번째, 관료와 기업, 특히 재벌의 속성은 무엇인가? 세번째, 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마침내 기득권에 포섭되어버리는 정치인이란 과연 무엇인가? 김종인의 경험담에는 수많은 정치인이 등장한다. 그들을 보며 과연 어떤 정치인이어야 하는지, 특히 진보 정치인이란 무엇인지 좌표를 세워볼 수 있다.

김종인은 얼마전까지 보수 정당에 몸담았다. 그렇다고 문재인과 586이 김종인보다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적폐청산은 검찰으로 상대 정치인을 제압하려는, 다시 말해 정치를 축소시키고 사법을 확대하려는 발상이다. 검찰 개혁은 반대로 정치를 확대하고 사법을 축소하려는 기획이다. 필연적으로 그 둘은 모순이다. 사람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제쳐두고 이 모순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보수정당은 부활했고 이재용은 가석방됐다. 관료와 경제 권력에 기대면서 불평등은 커지고, 선거는 엘리트의 순환에 그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김종인이 답인가? 무어라 핑계 대든, 그는 앞에 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내는 사람이 못되었다. 그 누가 김종인을 보고 피를 끓이겠는가? 그는 조직을 만들어 뿌리내리지 않았고, 기반 없는 유능함은 결국 끝까지 발휘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세 차례에 걸친 배신이었다.  단독자는 다른 말로 ‘어느 쪽도 아님’이다. 그는 우산을 만드는 사람일 수 있으나, 같이 비 맞는 사람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진정 정치인이 두어야 할 좌표는 어디란 말인가?

“인생에 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신의 발자국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지나갈 적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투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다.” ‘복지는 곧 안보’라는 신념 아래, 비스마르크는 사회의료보험과 연금 제도를 선제적으로 시행했다. 권위주의 정부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행한 정책이 역설적으로 현재 독일 사민주의의 기틀이 되었다.

그래서 진보는 차라리 나뭇잎 사이 가려진 오솔길같다. 현실에서 어느 특성을 선택하는 것은 곧 그 이면을 버린다는 것과 같다. 누구든 이런 한계를 가질 바에야 사안별로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인간적이고 지적인 유연함을 갖추는 게 진보 정치인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야 팽팽하게 맞서는 세력의 균형을 영민하게 비틀어 진보쪽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것 아닐까.

Reference

[성한용 칼럼] 김종인 ‘색깔론’은 어울리지 않는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1274.html

[성한용 칼럼] 경세가 김종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786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