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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아니👤 - 데린 게스트, 로버트 고스, 모나 웨스트, 토마스 보해치 <퀴어성서주석>

모순을 다시 해석하는 일에 관심 있다면

그 시기에 인간 본연에게 요구한 교훈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도 무용하지 않을 가치를 공유하려 한 이유를 알고 싶게 한다면, 나는 이 책 앞에서 신앙을 회복하고 싶고, 더 나아가 존재 그 자체로 존귀해야 하는 이들의 권리와 그렇지 못하는 순간순간의 현실과 비교하여 내 역할을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함께 읽어보며 저마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길 희망한다.

코로나19 시기의 혼란한 모습이 여전히 생생하다. 2016년 10월부터 2017년까지 있었던 촛불집회의 반작용처럼 코로나 방역 기간에 연이어 발생했던 특정 진영의 반대 집회가 열렸다. 대규모 집단 감염 혹은 방역에 구멍이 뚫린 데에 종교집단의 이름이 세간에 자주 언급되었다. 차별금지법을 두고 집권 정당에서는 기계적 찬반 균형을 바탕으로 한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치유되어야 할 존재’부터 ‘나라의 사상 통제 수단’이라는 논리들이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앞에 쏟아져 나왔다.

사회의 갈등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지만, 가장 안타까운 건 갈등의 영역이 너무도 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선거에 있어서 당장 선거의 변수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다수로 뭉치지 못하거나, 먹고사는 기본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기만 하면, ‘그 이외의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만다. 어떻게 보면, 이 사회는 개인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법으로 정해지기에는 너무도 (다른 의미로) 바쁘고 또 무관심하며, 방치되기 쉽다는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존재에 대한 인정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존재로서 인정받는다면, 그다음에는 존재가 권리를 주장할 때 정치적 행위 판단 영향을 주게 된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에 있겠다. 존재로서 사회에 등장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단순하다고만 볼 수 없는 상황이 있다. 태어나는 것은 존재가 형성된 것이고, 죽는 것은 존재가 소멸된 것이다. 하지만 태어나도 어떤 부정적이거나 나약하다는 편견의 수식어를 벗어던지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거나 자격을 얻어내는 과정이 사회적으로 요구된다. 어떤 죽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너무도 조명받지 못한 나머지 쉽게 잊혀지는 한 편, 다른 어떤 죽음은 그의 모습과 말과 기록이 타인을 통해 전해지고 전해져서 영원에 가까이 기억에 남는다. 각설하여, 어느 한 법이 삶의 어떤 부분을 규정짓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 먼저 그 법이 없는 상황의 사회에서 누가 더욱 큰 발언권을 가지는지 살펴봐야 한다. 혹은 누가 존재 자체를 부정할 폭력을 누리는지 살펴봐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엄하다’라고 기계적으로 당연하게 배운다. 하지만 앞서 말한, ‘존재로서의 인정’ 혹은 ‘존재’ 그 자체로 사회에서 부당한 편견에서 벗어나는 일은, 매우 다양한 범주의 갈등 속에서 ‘당연하지 않’게 되거나, ‘증명해야만 누릴 수 있는’ 상황에 종종 부딪히는 것이다.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각 요소를 콕 찝어내는 분석은 쉽겠지만, 실제로 많은 경우에는 여럿은 연결되어 있다. 약 2000년 전, 그 사회의 전통법을 다루며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향유하던 이들에게 빈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는 한 목자의 언행 하나하나가 위협이 되고 결국은 죽음으로 침묵시켜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이유는, 목자의 존재 자체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체계를 아득히 뛰어넘고 오히려 편견과 쌓아왔던 모순을 지적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목자가 하려던 메시지가 ‘너 자신을 증명하라’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는 로마군의 백부장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의 파이스(남자 친구)가 아프다고 했을 때, 거리낌 없이 백부장의 친구를 치유해준다. 그는 증명 이전에 그 증명을 이미 몸소 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했으며, 여기서 말하는 증명은 ‘타국의 선지자에게, 자신이 정말로 아끼는 이의 건강을 위해, 군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감안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에 이미 담겨있다.

신앙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믿는 종교 공동체에서 주로 다루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경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또한 너무나도 쉽고 충격적인 말로, 지금 나오는 모든 논의를 의미 없게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내가 <퀴어 성서 주석. 1: 히브리성서>에 관한 기사글을 봤을 때 쉽게 접한 일부 권위자의 발언이 그와 같다. ‘퀴어 신학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이단이라는 말이 가지는 힘은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일축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건 사회의 주류 혹은 해당 영역에 주류에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일테다. 인간의 욕구는 비슷할진데 더욱 착하고 약자의 입장에서만 이해하기 쉽게 말하라고 강요할 권리부터, 듣고도 무시하고 조롱하거나 낙인찍을 수 있는 힘을 향유하고 그들이 가진 해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것이다.

책이 엄밀히 성경 구절에 나오는 부분에 해석과 질문을 남기는 것에 각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개신교를 믿는 어떤 친구와 퀴어의 권리에 관해 이야기 나누던 와중에, 레위기에 나온 토에바(가증스러움, abomination) 이야기와 ‘치료된 이들의 간증’ 그리고 퀴어를 어떤 수간의 사례와 계속 동일시하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를 맹목적으로 들으며 얕게나마 그들이 믿는 신앙에 염증을 느껴갈 때 즈음, 이 책을 통해서 다른 시각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신앙을 비록 저버렸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부터 이해하기 싫었던 영역까지 확장되었던 마음속 분노는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이자’에 관한 명확한 워딩이 있음에도, 현대사회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구절은 그저 ‘탐욕적이지 말라’는 교훈으로 치부된다. 그러면서도 레위기에 나오는 ‘가증스러움’ 전후를 둘러싼 구절의 명확성(여성과 여성의 관계)과 그 대상(이스라엘 백성으로 국한되는 신분 체계의 설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조건적인 사랑과 ‘누군가를 그들이 생각하는 악덕으로부터 치유’함에서의 사랑은 얼마나 맞닿는가? 수간이라는 행위 이전에, 관련한 지문을 보는 사람과 이들이 정착시킬 수 있는 사회적인 규범은 누구를 체계적으로 사회에서 소외시키는가? 소돔인들이 저지른 죄악을 재물 앞에서 인간성을 벗어던지고, 손님으로 온 이들을 망신시키고 죽이는 의지까지 보임으로 하여 압제하려는 모습을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경고로 국한시켜서만 생각할 수 있는가?

암암리에 수용되고 있는 어떤 모순을 밝혀내고, 어떤 편견에는 다른 해석을 살펴보고, 새로운 모습으로 그 시기에 인간 본연에게 요구한 교훈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도 무용하지 않을 가치를 공유하려 한 이유를 알고 싶게 한다면 나는 이 책 앞에서 신앙을 회복하고 싶고, 더 나아가 존재 그 자체로 존귀해야 하는 이들의 권리와 그렇지 못하는 순간순간의 현실과 비교하여 내 역할을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을 함께 읽어보며 저마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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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혁 - 토마 피케티 <피케티의 사회주의 시급하다>

능력의 유전자

동등한 기회를 지닌 상태에서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근대사회의 불평등은 정당할까? 지난 모든 인류 사회가 그러했듯 자본주의가 내부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서사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능력 본위의 서사라고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