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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속도보단 울림!

삶의 속도는 산업화 이후 가속화되고 있다. 자연에서 태어난 우리는, 자연의 울림을 버리고 빠르게 기계화된다. 속도, 그게 뭐가 중요한가! 빠른 여름도 산업화가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당신에게, ‘울림’은 무엇인가? 대부분은 특정한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경험을 하며 울림을 느낀다. 사람들은 울림을 사랑한다. 울림의 크기에 관계없이 울림을 사랑한다.

당신은, 울림을 어디서 느끼는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공연을 관람했을 때 울림을 느끼는가? 아침 산새가 지저귈 때, 울림을 느끼는가? 누군가가 뛰어다니는 건물에서 울림을 느끼는가?

내가 느낀 가장 큰 울림은 자연에 있다. 오케스트라의 울림은 눈과 귀로 전해진다. 공연장의 여러 장치가 울림을 나에게 전달해준다. 건물의 진동은 그 공간으로 하여금 나에게 울림을 전달해준다. 그러나, 내가 느낀 어떠한 울림도 그 웅장함에 비례하진 않았다. 산에 올라가면 발 밑으로는 나뭇잎의 울림이 들리고, 피부로는 공기의 울림이, 코로는 향기의 울림이 들린다. 이른 아침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 새벽공기만의 상쾌한 울림이 있다.

이 종소리의 경우 나에게 들려온 선율은 공기에 의해 팽팽해진 선율이며, 솔잎을 포함한 숲의 모든 잎사귀들과 이야기를 나눈 선율이며, 자연을 원소들에게 붙들려 조율된 다음 계곡에서 계곡으로 메아리쳐진 선율인 것이다. 메아리는 어느 정도는 독창적인 소리이며 바로 여기에 메아리의 마력과 매력이 있다. 메아리는 종소리 중 되울릴 가치가 있는 것을 되울린 것일 뿐 아니라, 그 일부는 숲 자체가 내는 소리이기도 하다. 즉 숲의 요정의 속삭임과 노래가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1854)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물질주의에 반하여, 산 속에서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산의 울림에 집중하고, 메아리를 선율로 느끼며 말이다. 그의 집 또한 그가 지은 것이었다. 그의 신발은 신발은 한두 켤레, 옷도 한두 벌에 불과했다. 그는 물건이 필요할 때만 노동하여 물건을 소비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일하지 않는 한심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물질주의에 반하는 가치관을 보여준 것이다. 소로우의 물질주의에 반하는 가치관은 현대에 이르러 고평가 받는다.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필자는 소로우의 ‘속도의 미학’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소로우는 속도의 미학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인 듯하다. 표면적으로 그는 물질주의에 반대하였다. 산업화가 가져온 과도한 소비 문화를 이해하지 못 했다. 모든 것을 빠른 주기로 갈아치우고, 예전이라면 ‘아직 쓸 만한’ 물건을 ‘더 이상 쓸 수 없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사회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산업화 이후, 그 소비의 속도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2년을 주기로 휴대전화를 갈아치운다. 아직 기능적 결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분명 신형 제품을 살 땐 100만 원을 상회하는 가격이었는데, 바꿀 때가 되니 그 만큼의 가치는 아닌 것 같다. 환경 보전을 외치면서도, 휴대폰을 고쳐 쓰기보다는 신형으로 구매하는 사람이 많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은 중고제품을 소비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물건을 갈아치우는 이유는 ‘남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소로우의 반물질주의 그 이면에는 그가 추구하는 속도의 미학이 담겨있다.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물건이 빠른 속도로 갈아치워진다고 해서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나는 느린 채로 살아도 괜찮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전자기계만 빠른 속도로 갈아치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사회의 한 기계 부품으로 취급되며, 빠른 속도로 갈아치워진다. 점점 짧아져만 가는 직업수명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남들과 같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보니, 자신의 울림을 가지지 못한 채 부품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왜 우리는 성공하려고 그처럼 필사적으로 서두르며 그처럼 무모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난과 보조를 맞추기 에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 1854)

당신에게는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자연과 같은 울림이 없을 것이다. 메아리를 치는 산과 같은 울림도, 능선과 같은 부드러운 울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의식하며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다. 온전한 나의 울림을 갖지 못했기에, 자연에서 태어난 나는 사라지고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우리는 우리의 울림을 가져야 한다. 나의 봄을 봄으로 누리기 위해서. 나의 봄이 여름처럼 뜨겁지 않기 위해서. 속도, 그게 뭐가 중요한가? 빠르게 찾아오는 여름도 산업화가 만들어낸 것일 뿐인데!


주간장학생 시즌2 3회